일상/책

언어의 무지개 – 고종석 지음

보건교육사 리창 2020. 11. 8. 14:35

<언어의 무지개 – 고종석 지음>

 

 

이 책은 글을 쓰거나, 읽거나, 생각하는 것에 깊이를 더해줍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언어에 관한 책의 내용만큼이나 잘 쓰인 글이 어떤 것인지 책 속의 문장을 읽으면서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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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불행은 우리 사회에서 그의 자유주의의 불온성·과격성이 백안시·위험시되고 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제대로 된 비판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도 있다. 정운영을 제외한다면, 복거일의 비판자들은 대체로 비판의 대상보다 정신의 키가 훨씬 작은 사람들이었다. 이 글에서 이따금씩 그를 비판할지도 모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를 같은 높이에서 비판할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 우리 사외에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논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를 꺼린다. 마땅치 않은 상대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고 대드는 것보다 없는 듯 무시하는 것이 언제나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지적 미숙아들의 몫으로 남았다. 복거일을 둘러싼 논쟁이, 그렇지 않아도 드문 논쟁이, 사오정 시리즈를 닮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거기서 속 터지는 것은 사오정이 될 수 없는 복거일뿐이다.

 

그러나 최원식의 그 무성의한 글에서 독자를 가장 불쾌하게 하는 것은 논쟁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궤변을 일삼는 것이다. “서구주의와 국수주의는 단순한 대립물이 아니라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서구주의의 뒤집혀진 형태가 국수주의다” “(복거일의) 서구주의는 민족주의의 매우 특이한 변종일지도 모른다따위의 발언들이 그것이다. 최원식에 의해서 복거일은 국수주의자’ ‘민족주의자의 영광을 얻었다. “갑과 을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갑의 뒤집혀진 형태가 을이다” “갑은 을의 매우 특이한 변종이다따위의 말투는 논리와 수사를 멋들어지게 결합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멋쟁이 지식인들이 애용하는 이런 지적논법의 명제들이 어떤 맥락에서는, 그리고 깊은 수준에서는 더러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맥락, 그런 수준의 진실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진실들이다. 그리고 발언의 맥락이 그런 깊은 수준이 아닐 때는 궤변이 되고 만다.

예컨대 나는 최원식의 말투를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박정희와 장준하는 단순한 대립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김동리의 뒤집혀진 형태가 김정한이다, 백낙청은 김현의 매우 특이한 변종이다···, 에라, 어차피 만물은 유전하는 것인데 자유주의의 전화가 파시즘이고, 파시즘의 전화가 민주주의고, 민주주의의 전화가 볼셰비즘이고, 볼셰비즘의 전화가 아나키즘이고, 그래서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늬들 왜 싸우니 그놈이 그놈인데···.” 이런 무책임한 말투는 도사들에게나, 그러니까 성철 정도 되는 두목급 중들에게나 허여되는 말투지, 현실을 분별하는 것이 직무인 세속의 글쟁이에게 허여되는 말투가 아니다.

 

다섯 세대 안에 영어가 대부분의 사회들에서 공용어가 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거나 단 몇십 년 뒤엔 (영어가 아닌) 민족어를 모국어로 가진 것은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될 것이라는 복거일의 예측은 무척 대담해 보이지만, 내게는 그것마저 매우 조심스러워 보인다. 사실은 지금도 영어가 아닌 민족어를 모국어로 가진 것은 적어도 지식과 정보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만만찮은 짐이며, ‘대부분의 사회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느슨하게 이해할 경우 영어가 공용어가 되는 데 다섯 세대까지 걸릴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는(그 언어를 영어라고 부른다면) 그리스/로마 문화만이 아니라 태고 이래 그때까지의 동서 인류문화를 한껏 빨아들인 영어일 것이고, 부분적으로 지방화된 영어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금의 한국 사회와는 달리 단일인종 사회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를 나누지 않은 이웃들과 사귀는 법을 배울 것이고, 또 그들과 를 나누는 법도 배울 것이다.

 

지식인들은 더러 추상적 어휘로 이뤄진 번역 말투를 대화에서 부림으로써 제 교양을 뽐낸다. “아는 게 돈인 세상이야지식의 자본화가 가속화하는 시대야로 뒤치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일상의 문화적 물질대사를 통해 축적된 습속의 각질을 깨고 우아한 가능세계로 탈주하는 건 실존의 개연적 사태 너머에 있어로 비비꼬며, 이들은 제 알량한 허위의식을 만족 시킨다. 이런 실천은 더러 역겹고 자주 코믹하지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구별짓기는, 언어를 통하든 소비지출이나 취향의 실천을 통하든, ‘실존의 개연적 사태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무지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