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26

이토록 평범한 미래 – 김연수 / 문학동네

18p. 사람들은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고 말하지만,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의 바다다, 이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모습이 가려진다. 파도는 바다에서 비롯되지만 바다가 아니며, 결국에는 바다를 가린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으리라,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왜 불안해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이 실제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신한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

일상/책 2024.02.19

상처 떠나보내기

단정적인 말투는 갈등을 불러온다. 단정적인 태도 역시 갈등을 일으킨다. 대화의 행간에 여유가 있고, 관계에 공간이 넉넉하다면 부딪혀서 불꽃이 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녀나 배우자나 친구들을 대하는 자신의 말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어떤 상황에 어떻게 의견을 개진하는지, 그리고 그런 태도가 상대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관찰해보면 좋겠다.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상대도 좋아해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상대의 행동이 마음에 들 때만 받아들이는 것도 유아적 폭력이라 부를 만하다. 자기 기분대로 상대의 행동을 판단한다면, 경계선 성격 성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영향력을 팽창시켜 상대의 감정 턱 밑에까지 들이대는 행..

일상/책 2023.09.05

지지 않는다는 말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때로 즐거운 마음으로 조간신문을 펼쳤다가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물론 마음이 약해졌을 때다. 하지만 그 약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가장 건강한 몸은 금방 지치는 몸이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이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썼다. 소설 얘기는 하지 않고 건방지다거나 세상에 너무 화를 내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

일상/책 2023.09.04

당신. 꽃잎보다 붉던

"인혜야, 엄마 왔네. 저어기, 저기 엄마!" 일흔이 넘은 주인공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것은 그것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선가 보고 들었을 법한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작품을 다 읽고 느낀 감정은 완전한 새로움이었다. 몇몇 장면들은 영화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남고 세련되게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의 필력에 감탄한다. 선이 굵은 소설이다.

일상/책 2023.09.03

소설가의 일 - 김연수 산문

앤서니 버제스가 말한 것처럼 모든 악평은 작가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와 같다. 손가락 정도라면 참을 수 있으리라. 허벅지라고 해도 견뎌야만 한다면 견뎌보겠다. 하지만 심장이라면 좀 곤란하다. 죽이려고 찌르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잘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원래 소설가는 좀 호들갑스럽다. 왜..

일상/책 2023.09.02

정미경 – 당신의 아주 먼 섬

52p.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공간을 쳐다보았다. 빛의 산란 같기도 하고 먼지 같기도 한 자잘한 입자들의 운행 너머 나무 선반이 있고 그 선반을 책들이 채우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듬성듬성 벽면이 보일 만큼. 왜 그런 백일몽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내려오기 전부터 정모는 의식적으로 책을 멀리하고 있었다. 읽기는커녕 곁에 두지도 않았다. 신경증적인 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백일몽은 단숨에 정모를 사로잡았다. 136p. 절벽 아래엔 동굴이 하나 있다. 높이는 겨우 앉은키 정도이지만 꽤 깊고 안쪽은 입구보다 넓었다. 턱에 걸터앉으면 꽤 먼 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이우는 혼자서도 거기까지 자주 걸어가 싫증이 날 때까지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자잘한 모래와 자갈이 섞인 바닥에 나란히 앉아 젖은 바위에..

일상/책 2023.06.16

고래 – 천명관

216p. 잠시 후, 금복의 몸 구석구석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이 나오자 그녀는 마치 진기한 보물지도를 들여다보듯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풍만한 엉덩이, 뜨거운 눈빛과 발그레한 뺨은 모두 사라지고 죽은 나무 삭정이 같은 앙상한 뼈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금복은 사진을 집으로 가져와 전등불에 비춰보며 홀린 듯 며칠동안 관찰하다,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니까 다 껍데기뿐이란 말이군, 육신이란 게 결국은 이렇게 하얗게 뼈만 남는 거야.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그리고 곧 내키는 대로..

일상/책 2023.04.30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137p. 고씨 집안사람 하나가 친일파였다. 친일로 제법 돈을 모았고, 일본에 헌납도 한 모양이었다. 해방 직후 면의 젊은 이들이 그를 당산나무 아래로 끌고 왔다. 쳐 죽이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혈기왕성한 젊은이 하나가 낫을 들고 다가가자 누군가 빽 소리를 쳤다. 젊은이의 어머니였다. “그 어른 아니었으면 니가 시방 산 목심이 아니어야!”, 젊은이가 어린 시절 이질로 죽어갈 때 고씨가 병원비를 댄 것이다 사라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우리 애기 학벵 끌레가게 생겼는디 고씨 어른이 손을 써줬그마요.” 고씨 성토장이 이내 미담장으로 변했다. 쳐 죽이자고 했던 젊은이들도 그만 머쓱해져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못심은 부지하는 것이여.” 228p. ..

일상/책 2023.03.12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46p.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나까, 살아라. 150p. 대부분의 성공에는 운이 따른다. 반면 실패는 악운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패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직면한 실패가 자연스런 결과로서의 실패인지, 혹은 의도에 의한 음모와 배신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일상/책 2023.02.27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그이가 당신이에요 나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도 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이 당신입니다 나의 부끄러운 죄를 통째로 알고 계시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일 터이지요 그분이 당신입니다 나의 아흔아홉 잘못을 전부 알고도 한 점 나의 가능성을 그 잘못 위에 놓으시는 이가 가장 나를 사랑하는 이일 테지요 그이가 당신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의 사랑이고 싶어요 당신의 한 점 가능성이 모든 걸 능가하리라는 것을 나는 세상 끝 날까지 믿을래요 나는, 나는 당신의 하늘에 첫눈 같은 사람입니다

일상/책 2023.01.15

책 읽는 삶 – C. S. 루이스

18p.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아를 지키고 더 강화하려는 일차적 충동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아를 벗어버리고 그 편협성을 바로잡아 외로움을 치유하려는 이차적 충동도 함께 갖고 있다. 바로 사랑, 덕행, 지식 추구, 예술 감상 등을 통해서 우리는 이 일을 한다. 이 과정은 자아의 확장이나 자아의 일시적 소멸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오래된 역설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76p. 그런데 이 환한 그림자는 책에서 나와 현실 세계 속으로 들어왔으며, 거기에 머물렀고, 모든 평범한 것을 변화시키면서도 그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평범한 것들이 그 환한 그림자 속으로 끌려드는 것을 보았다. “이 어찌된 일인가”[눅 1:43]. 당시 나는 수치심이 깊었고 지적으로..

일상/책 2022.12.26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 김형수 지음

이 창작방법의 문제가 중요해진 것은 근대인들이 작가와 작품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입니다. 그런 논란의 첫 대상에 오른 사람이 발자크예요. 발자크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소설은 진보적이었습니다. 현실 옹호론자가 현실을 야유하는 글을 썼어요. 그래서 ‘발자크의 정치적 보수성과 미학적 진보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가지고 논란이 일게 됩니다. 엥겔스가 이를 ‘방법의 승리’로 해석하면서 촉발된 논쟁이 루카치가 사용했던 유명한 논제 즉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였어요. 하여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관과 방법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 작가의 똑똑함과 작품의 그럴싸함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문제는 근대문학의 여명기를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p.166

일상/책 202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