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 창비>
137p.
고씨 집안사람 하나가 친일파였다. 친일로 제법 돈을 모았고, 일본에 헌납도 한 모양이었다. 해방 직후 면의 젊은 이들이 그를 당산나무 아래로 끌고 왔다. 쳐 죽이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혈기왕성한 젊은이 하나가 낫을 들고 다가가자 누군가 빽 소리를 쳤다. 젊은이의 어머니였다. “그 어른 아니었으면 니가 시방 산 목심이 아니어야!”, 젊은이가 어린 시절 이질로 죽어갈 때 고씨가 병원비를 댄 것이다 사라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우리 애기 학벵 끌레가게 생겼는디 고씨 어른이 손을 써줬그마요.” 고씨 성토장이 이내 미담장으로 변했다. 쳐 죽이자고 했던 젊은이들도 그만 머쓱해져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못심은 부지하는 것이여.”
228p.
나는 늘 그 이전의 날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버지가 나를 태우고 미친 듯이 폐달을 밟던 어느 가을날이. 지각인 줄 알고 엉엉 울며 뛰어 들어간 교실에는 가능 로후의 햇살만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낮잠에서 깨어난 나를 다음 날 아침이라고 원껏 곯린 아버지는 잔뜩 뿔이 난 내 손에 햇살처럼 고운 홍옥 한알을 건네주었다. 이가 시리도록 새콤한 홍옥을 베어 물며 동아로던 신작로에는 키큰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산들거렸다.
정지아 작가는 1965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 창작과를 나와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1990년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빨치산의 딸'이라는 장편소설을 통해 데뷔했으며 이 작품은 당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적 표현물로 지정되어 판매금지 10년 후인 2005년에 재출간되었다. 2006년 '풍경'으로 제7회 이효석문학상, 2008년 '봄빛'으로 제14회 한무숙문학상, 2020년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로 제14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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