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 – 당신의 아주 먼 섬 / 문학동네>
52p.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공간을 쳐다보았다. 빛의 산란 같기도 하고 먼지 같기도 한 자잘한 입자들의 운행 너머 나무 선반이 있고 그 선반을 책들이 채우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듬성듬성 벽면이 보일 만큼. 왜 그런 백일몽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내려오기 전부터 정모는 의식적으로 책을 멀리하고 있었다. 읽기는커녕 곁에 두지도 않았다. 신경증적인 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백일몽은 단숨에 정모를 사로잡았다.
136p.
절벽 아래엔 동굴이 하나 있다. 높이는 겨우 앉은키 정도이지만 꽤 깊고 안쪽은 입구보다 넓었다. 턱에 걸터앉으면 꽤 먼 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이우는 혼자서도 거기까지 자주 걸어가 싫증이 날 때까지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자잘한 모래와 자갈이 섞인 바닥에 나란히 앉아 젖은 바위에 부딪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우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어도 좋았다. 머리를 숙이고 기다시피 들어가 안쪽을 살펴보고 나왔던 날 이우는 여기 앉아 그랬었다.
아주 오래전엔 바닷물이 저 안까지 들어갔구나. 만 번, 또 만 번의 파도가 저 동굴을 만들었겠지. 넌 모르겠지만, 내 안에 저만한 구멍이 있어. 내 몸보다 더 커. 휑하고 휑해서 나는 가끔 내가 없는 것 같아. 그 구멍이 언제 생겼는지, 너한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무리 네가 못 듣는다 해도. 구멍이 생긴 순간, 그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거든.
정미경 작가는 1960년 2월 4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87년 중앙문학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하며 문학계에 데뷔했으나 이후 10년 넘게 문학 작업에서 물러난 후, 단편소설 "비소여인"으로 재데뷔하여 그 후로는 계속해서 소설을 썼다. 정미경 작가의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을 투쟁하는 이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비소여인", "밤이여, 나뉘어라" 등의 단편소설, 그리고 "장밋빛 인생",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아프리카의 별"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또한, "나의 피투성이 연인",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내 아들의 연인", "프랑스식 세탁소" 등의 단편소설집도 있다. 그녀의 작품은 2006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상을 받았다. 2017년 1월 18일에 사망하였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은 정미경 작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사망 후 그녀의 남편인 화가 김병종이 원고를 발견하여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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