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고래 – 천명관

보건교육사 리창 2023. 4. 30. 23:00

<고래 – 천명관 / 문학동네>

 

216p.

잠시 후, 금복의 몸 구석구석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이 나오자 그녀는 마치 진기한 보물지도를 들여다보듯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풍만한 엉덩이, 뜨거운 눈빛과 발그레한 뺨은 모두 사라지고 죽은 나무 삭정이 같은 앙상한 뼈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금복은 사진을 집으로 가져와 전등불에 비춰보며 홀린 듯 며칠동안 관찰하다,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니까 다 껍데기뿐이란 말이군, 육신이란 게 결국은 이렇게 하얗게 뼈만 남는 거야.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그리고 곧 내키는 대로 아무 사내하고나 살을 섞는 자유분방한 바람기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평생을 죽음과 벗하며 살아온 그녀가 곧 스러질 육신의 한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덧없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348p.

그는 이번에도 애써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아무도 호응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차가운 눈길로 약장수를 쳐다보았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물리적인 폭력을 쓰진 않았지만, 그들은 마치 이리 무리에 잘못 끼어든 승냥이를 쫓아낼 때처럼 냉담하고 잔인해져 있었다. 그것은 지식인으 법칙이었다. 약장수는 모든 것이 끝났으며 자신이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카페를 ᄄᅠᆫㅏ기 전 좌중을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 이보시오들, 이제 심판은 그만두로 링 위에 한번 올라가보는게 어떻겠소?

 

 

천명관 작가는 1964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골프용품 판매, 보험 외판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30대부터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으나, 본인이 목표했던 영화감독 입봉에는 실패했다. 마흔 살에 동생의 권유로 처음 써 본 단편 소설 <프랭크와 나>2003년에 등단하였고, 연이어 2004년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고래>가 비평적, 대중적 성공을 동시에 거두며 유명해졌다. 2019<뜨거운 피>로 영화감독으로 입봉했으나 코로나-19로 개봉 일정이 연기되었다가 2022323일에 개봉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하였고, 평가도 좋지 않았다. 이후 2023년에 <고래>'2023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작에 오르며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19년 만에 재조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