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책

소설가의 일 - 김연수 산문

보건교육사 리창 2023. 9. 2. 22:00

<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앤서니 버제스가 말한 것처럼 모든 악평은 작가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와 같다. 손가락 정도라면 참을 수 있으리라. 허벅지라고 해도 견뎌야만 한다면 견뎌보겠다. 하지만 심장이라면 좀 곤란하다. 죽이려고 찌르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잘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작품만큼이나 그 작품을 쓰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원래 소설가는 좀 호들갑스럽다. 왜냐하면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믿으니까. 왜 그런가? 소설가는 이 우주가 ‘나/주인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소설가의 ‘나/주인공’ 중심성은 어쩔 수 없는 직업적 습관이다. 이제 소설을 한 이십 년쯤 썼기 때문인지,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도 요즘에는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가로채며 “다 비켜, 나만 말할 거야!”라고 외치곤 하는데, 이게 다 소설 쓸 때 배운 못된 버릇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소설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누군가 ‘소설쓰고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먼저 글을 썼고, 지금은 그 글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쓰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쓰는 게 소설가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여러 겹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제일 바깥쪽을 추상적이고 큰 단어들, 예컨대 평화, 정치, 슬픔, 절망 따위의 단어들이 단단하게 감싸고 있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구체적이고 작은 단어들이 숨어 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쓸 때, 우리는 대개 제일 바깥에 있는 단어들로 글을 쓴다. ‘5월을 보내는 마음이 슬프다’느니, ‘’그녀는 질투심이 많다‘느니. 자기가 쓴 초고를 보면 누구나 약간의 구토 증세를 느끼는 데,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이 우주가, 아니,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좀 쓸 만한 단어는 그런 너저분한 단어들을 뚫고 가야 나온다. 그런데 소설가라면 방금 한 이야기를 좀 다르게 설명하는 게 좋겠다. 예컨대(라고 쓰면서 좀더 구체적인 사례를 드는 방식은 소설가의 문장에서 필수적이다.) 빈도수 염력사전 같은 게 있다고 치자. 이 상상의 사전에는 표제어가 빈도순으로 배치된다. 말하자면(이라고 쓰고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간다) 신문과 잡지와 책, 그리고 우리의 대화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와 표현은 앞쪽에 있고,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단어와 표현은 뒤쪽에 있다. 이 사전의 페이지는 손이 아니라 생각의 힘으로만 넘길 수 있다. 그러니까 갈피를 넘겨서 뒤쪽의 단어와 표현을 보려면 더 많은 생각의 힘, 그러니까 염력이 필요하다. 초인적인 염력을 발휘해 남들보다 훨씬 뒤쪽의 단어와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그의 문장은 훨씬 좋을 것이다.

다 알고 있다시피 작가는 거짓말을 진실처럼 들리게 말하는 사람이다. 이때 ‘진실처럼’이 들어가는 자리에 ‘핍진성 있게’라는 말을 넣으면 된다. 소설과 비소설의 차이는 이 핍진성에 있다. 비소설에서 진실이란 실제로 벌어진 일을 뜻하지만, 소설에서 진실이란 반박할 부분이 한 곳도 없는 완벽한 이야기를 뜻한다. 물론 소설을 써보면 알겠지만, 반박할 부분이 한 곳도 없는 이야기를 쓰고 나면 실제로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거나 나중에 벌어지는걸 확인할 때가 있다. 소설 쓰다가 신 내린 게 아니라 핍진성 있게 쓴다는 말이 워낙 그런 뜻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에 푹 빠진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허구가 아니다. 그게 다 핍진한 문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고 플롯을 짜는가가 모두 이 핍진성에 기초한다.

2012년 여름에 펴낸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나는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라고 썼는데, 그런 점에서 소설가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소설가들이 의외로, 어쩌면 당연하게도 ‘말’에 상처를 잘 받는다는 점이다. 왜 지지 않는 코끼리가 아니라 지지 않는 말이냐면, 그 때문이다. 코끼리는 소설가에게 상처주지 않지만 말은 이따금 소설가의 진심을 완전히 짓밟아버리기도 한다.

소설가는 세상만사를 비틀고 뒤집어서 보는 사람이니까. 아흔아홉 명이 오른쪽으로 가고 있는데, 왼쪽으로 가는 한 명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게 여기는 작자가 소설가다. 그러므로 뭔가 심사가 꼬여 대세에 순응하지 않고 자꾸만 인생의 어둡고 습하고 음침한 구석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가능성이 농후할 뿐, 인생의 어둡고 습하고 음침한 구석으로 기어들어간다고 모두 소설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구석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직업군이 기어들어가니까. 그들과 소설가가 다른 점은, 소설가는 뭔가를 찾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기어든다는 점이다. 거기서 소설가가 찾는 건 뭘까? 오랫동안 소설을 써온 입장에서 말하자면, 어둡고 습하고 음침한 곳으로 기어들어간 건 거기야말로 내가 찾는 인생의 빛이 가장 잘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이야기’라고 말하겠다. 이걸 비틀면 ‘평생 어둡고 습하고 음침한 곳에서 버둥대는 이야기’도 된다.

우리가 사이코패스와 시선을 안 마주치려는 이유는 그자가 우리의 심연을 반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없이 저열하고 하찮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직 살인하고 죽이기만 하는 소설을 우리가 싫어하는 까닭은 심성이 착해빠졌거나 그게 인간의 추잡한 일면을 반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사적으로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살배기도 악을 저지를 수 있듯이 한 번도 제대로 글을 안 써본 사람이라도 살인하고 죽이기만 하는 소설은 쓸 수 있다. 서사적으로 봤을 때, 그런 이야기는 단순한 구조라 쓰기 쉽다. 앞에서 전락의 이야기보다는 회복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전락의 이야기는 대개 비슷하게 전개돼 개성 있게 쓰기 어렵지만 회복의 이야기는 천차만별이라 서사적으로 더 우월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악(증오)의 이야기로는 진부한 이야기를 쓸 가능성이 많다. 지금 우리가 신문이나 방송으로 접하는 모든 범죄자들의 이야기가 진부하기 짝이 없듯이 말이다. 그들은 모두 카인의 후예일 뿐이다. 말하자면 카인 이야기의 표절자들이다. 하지만 선(사랑)의 이야기는 모두가 오리지널이다. 만약 소설을 쓰는데, 뭔가 파괴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좀더 어렵고 인간적인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게 좋겠다.

삼십 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쓰지 말고, 무엇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마시고,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세요. 다시 한번 더 걷고, 먹고, 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감각적인 것들 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한 일이다. 하지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문장이 쓰여지느냐는 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소설을 쓸 수밖에 없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간다. 그런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노력 역시 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내가 쓰는 소설의 결말은 여기까지다. 그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새드엔딩이다. 뭔가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정말 느닷없이 ,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눈앞에 펼쳐진, 마치 기적처럼 바뀐 세상을 본다. 하지만 그건 절대 느닷없지도 않고, 기적도 아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간절히 소망했던 바로 그 세상이다.

- 소설가의 일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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